Saint Albert the Great-TOMMASO DA MODENA
1352.Fresco.Chapter House, San Niccolo, Treviso
축일:11월 15일
성 대 알베르토 주교 학자
Sain ALBERT the Great
St. Albertus Magnus, E. D. E
Sant’ Alberto Magno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1206 at Lauingen an der Donau, Swabia (now Germany) -
15 November 1280 at Cologne, Prussia (in modern Germany)
Beatified:1622
Canonized:1931 by Pope Pius XI
Name Meaning:noble, brilliant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수호 성인
성 알베르토는 이슬람교의 전파로 유럽에 전해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교회에 도입시키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13세기 독일의 도미니코회 회원이었다.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그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임을 알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이해하려는 알베르토의 시도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리스도교 철학과 희랍 지혜의 종합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알베르토는 호기심이 많고 정직하고 부지런한 학자로서 그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 받을 만하다.
그는 군인 계급의 막강하고 부유한 독일 영주의 장남이었다.
그는 자유예술을 배웠으며 집안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미니코 수도회에 들어갔다.
학문에 대한 끝없는 흥미는 자연 과학,논리학,수사학,수학,천문학,윤리학,경제학,정치학,형이상학 등 모든 지식의 개요를 쓰도록 했다.
그의 학문적 팽창은 완성되는 데만도 20년이나 걸렸다.
그는 "우리의 의도는 이미 전술한 모든 지식의 단편들을 라틴어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파리와 쾰른에서 교육자로, 도미니코회의 관구장으로 그리고 한때는
레겐스부르크의 주교로도 봉사하면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다.
그는 탁발 수도회를 옹호했으며 독일과 보헤미아의 십자군들에게도 설교했다.
알베르토는 교회 박사이고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수호 성인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현대의 정보 과잉 상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온갖 분야의 학문에 직면하도록 만든다.
교회의 제도와 그리스도교적 생활 양식, 그리스도교 신학 등에 대하여
사회 과학의 연구 결과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반응을 체험하려면 보통 가톨릭 잡지 몇 가지 만을 읽어도 된다.
결국 교회는 알베르토를 성인품에 올리면서 진리에 대한 교회의 개방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 진리가 어디에서 발견 되었든지 알베르토의 성덕을 내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진리를 받아 들여야 한다.
알베르토의 특징인 호기심은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철학적 지혜로 교회를 깊이 탐구하도록 했다.
"세상에는 지식 그 자체만을 위해서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수치스러운 호기심이다.
또한 세상에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 지식을 추구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허영이며 이것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아니면 명예를 위해서 지식을 원하기도 한다.
이것 역시 믿을 수 없고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지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이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바로 애덕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지식으로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그것을 찾기도 한다.
이것은 지혜이다.
이 모든 형태의 지식 추구 가운데서
마지막 두 가지만이 올바르게 사용되는 지식이라 할 수 있다."
(성베르나르도)
성 대 알베르또 주교의 (루가 복음 주해)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진실을 위한 목자와 교사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 이 말씀에서 두 가지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로 이 성사를 집행하라는 명령입니다. "이를 행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것을 뜻합니다.
둘째로 이것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주님에 대한 기념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이를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보다 더 유익하고 즐거우며 더 은혜롭고 사랑스러우며 영원한 생명과
더욱더 흡사한 것을 명하실 수 없었습니다.
이 몇 가지 특질들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기로 합시다.
성체는 현세에서 죄 사함을 얻고 은총의 충만에 이르는데 비할 바 없이 유익한 것입니다.
"영혼들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성화를 얻는 데 있어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성화는 그분의 희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성사 안에서 당신을 봉헌하실 때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바치시고 또 우리 선익을 위해 우리에게 바치셨습니다.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칩니다."
"성령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흠 없는 제물로 바치신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죽음의 행실을 버리게 하며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것입니다."고
성서는 말해 줍니다.
우리는 이 성사보다 더 즐거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즐거움을 보여 주시는 이 성사보다 더 즐거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서는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미리 준비하신 빵을 백성들에게 하늘로 부터 꾸준히 내리셨다.
그 빵은 누구에게나 맛이 있고 기쁨을 주는 빵이었다.
주님께서 주신 양식은 당신의 자녀에게 보이시는 기쁨의 표시였고,
그것을 먹는 모든 사람의 구미에 맞았으며 그것을 먹는 각 사람의 소원대로 그 맛이 변하는 양식이었다."
이 성사보다 더 은혜로운 것을 명하실 수 없었습니다.
이 성사는 생명 나무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열성과 충실한 믿음으로 영하는 사람은 영원한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입니다.
성서는 말합니다.
"그것은 붙잡는 자에게 생명의 나무가 되고 그에 굳게 매달리는 사람들은 복되다."
"나를 먹는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성사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을 명하실 수 없었습니다.
이 성사는 사랑과 유대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양식으로 주는 것은 사랑의 가장 위대한 표시입니다.
성서는 또 말합니다. "내장막 안에 있는 사람들이 말했다.
’우리가 실컷 배부를 만큼 자기의 살을 줄 사람이 누구인가.’"
이말씀은 흡사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합니다.
"내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또 그들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들을 나와 일치시키고
나의 지체가 되도록 나는 그들의 영혼 안에 거처하고 싶어하고 또 그들은 나를 먹고 싶어했다.
그들이 나와, 그리고 내가 그들과 이보다 더 친밀히 더 자연스럽게 결합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성사보다 영원한 생명과 더 흡사한 것을 명령하실 수 없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지속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축복 가운데 사는 성인들에게
당신의 모든 행복을 통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가톨릭홈에서)
Albert the Great,OP B Dr.(RM)
성 토마스 데 아퀴노와 성 보나벤투라와 더불어
중세기 신학계의 큰 권위자이며 또한 스콜라 철학의 선구자인 성 대 알베르토는
1206년경 독일의 도나우 강변의 라우인겐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경건한 교육을 받았으며, 청년 시절에는 이탈리아에 유학해 파도바 대학에서
문학과 자연과학을 연구했다.
학교 성적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으므로,
그가 전부터 열심히 공경하던 성모께 그 도움을 청해 간절히 기도한 바,
성모께서 나타나시어 "과연 네 뜻대로 하느님께 탁월한 지혜를 청해 주겠노라.
그러나 죽기 전에는 다시 그 지혜가 없어지고 전과 같이 되리라"하셨다는 것이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 축일:1월28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축일:7월15일
*성 도미니코 사제 축일:8월8일
1216년, 그가 파도바에 유학했던 때의 일이다.
창립된 지 얼마 안 된 도미니코회의 총장 요르단 신부가 그곳에 와서 일장의 강연을 했는데,
알베르토는 그 신부의 완덕에 대한 불타는 열정에 감격하고
자기도 그 수도회에 들어가 수도에 전념하려는 뜻을 품었다.
그러나 수사가 되어서 그 고행을 못이기고 수도원을 나오게 된다면
하느님께 매우 죄송스러운 일이라 하여 주저하던 중,
요르단 신부가 그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며 말하기를
"당신은 한 번 수도원에 들어가면 다시 세속에 나오게 될 염려는 없을 것이오. 나는 보장합니다"했다.
이 말을 예언으로 생각한 알베르토는 곧 마음을 결정하고 1223년에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했다.
파도바에 살던 그의 백부가 이 소식을 듣고 반대했으므로 그는 일단 독일에 돌아와
쾰른에 있는 수도원에서 수련을 마치고 신학을 연구해 신품을 받았다.
이어 자기 수도원에서 수사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던 중 1245년에 파리 대학의 초청으로 교수로서 지냈다.
당시 파리 대학이라면 전 유럽의 학술의 중심지였고, 전 유럽의 수재들이 모여든 최고학부이며,
그 교수가 되는 것은 실로 명예로운 출세였다.
이리하여 알베르토는 그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강의했는데,
과연 그 탁월한 학식은 일찍이 천하에 명성을 떨쳤고,
수많은 학생이 앞을 다투어 그의 밑으로 모여들었으며,
그 중에는 뒤에 위대한 신학자가 된 성 토마스 데 아퀴노도 끼어 있었다.
알베르토가 파리 대학 교단에 선 것은 불과 3년간 뿐이다.
순명에 의해 다시 쾰른으로 돌아가 그 곳 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파리 대학의 학생들은 누구나 식견이 탁월한 은사를 잃은 것을 심히 애석하게 여기며,
그 중에는 은사의 학덕을 사모해 쾰른 대학에 전학한 자도 수명 있었다.
신앙은 이치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 알베르토는
신학의 기초로서의 철학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철학을 주고 연구했다.
한편 자연과학에도 조예가 매우 깊었다.
후대에 그를 칭해 ’대 알베르토’라 한것은 ,
그가 위대한 인물이었고 위대한 학자며 위대한 성인이었다는데 연유한 것이다.
교황 비오 2세께서는 "그는 인간으로서 알 수 있는 바는 모두 알고 있었다."고
함축성 있는 격찬을 한 적이 있다.
알베르토의 저서는 대개 철학, 과학 방면에 관한 것이나,
그가 최초로 펜을 든 ’성모께 대한 찬미’라는 저서는
그의 성모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여실히 보여준 증거물이다.
그는 교단에서 강의 하는 한편, 기꺼이 설교대에 나서서 모든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으며,
빈민을 구제함에 적극 노력하고, 평화를 애호해 쾰른 시민과 그 지배자인 주교간에 일어난 분쟁을
두 차례나 조정 역할을 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1256년에 그를 아나니아에 초청해 교황청 고문으로 명하고,
1260년에는 그가 여러 번 사양함에도 불구하고 레겐스부르크의 주교로 임명했다.
겸손한 마음으로 이를 수락한 알베르토는 재정 관리는 모두 신임하는 수하 사람에게 맡기고,
고위 성직자의 몸임에도 가장 청빈한 생활을 하는 한편,
평신부와 같이 강론을 하며 성사를 주고, 또는 사제들의 신앙 생활을 북돋아 주기 위해
교구 내의 지방 순시를 자주 했다.
2년이 지난 후 주교의 대임을 면하기 위한 청원을 교황에게 내어 허락되자 그 직을 면하고,
다시 쾰른으로 돌아와 전과 같이 교단에 서는 한편,
주교의 보좌로서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해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자연히 기억력이 감퇴 되어감을 느낀 알베르토는 전에 성모께서 하신 말씀을 회상하고 이미 죽음이 가까움을 알고 선종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 2년 후인 1280년의 11월 15일 80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성 알베르토는 1931년, 비오11세에 의해 교회 박사 칭호와 더불어 시성되었고,
자연과학도의 수호 성인으로 공경 받고있다.
한 마디로 그는 위대한 자연 과학자들 가운데 최초의 위인이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볼슈텟트 백작의 장남인 알베르토는 독일 스바비아의 라우인겐 가족 성에서 태어나,
파두아의 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223년에는 가족들의 온갖 반대를 무릅스고 거기서 도미니꼬회원이 되었다.
그는 1228년, 쾰른에서 가르치다가 그 후 힐데스하임, 프리부르그-임-브라이가우, 로젠부르그,
그리고 스트라스부르그에서 교수하였다.
쾰른으로 돌아올 즈음에 그는 그의 지식과 강의에 대한 명성이 날로 치솟고 있었다.
그는 파리 대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가르칠겸 그 학교로 가서, 1245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248년, 쾰른에 세워진 스투디아 제네랄리아의 신임 이사장으로 임명되었다.
파리와 쾰른 대학교의 문하생 가운데에서는 저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었다.
그는 아퀴나스의 천재성을 일찍 알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퀴나스는 지적으로 나의 좋은 동료이자 친구이다.
이 말 그대로 아퀴나스는 1274년 죽을 때까지 그와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였던 것이다.
1254년에는 그의 수도회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어 로마로 갔는데,
알베르토는 거기서 윌리암 아르무르의 공격에 대항하여 탁발 수도회를 옹호하는데 진력하였다.
윌리암은 그 후 알렉산델 4세 교황에 의해 단죄되었다. 그가 로마에 머무는 동안
교황의 신학 고문으로 봉사하였다.
알베르토는 1257년 관구장직을 사임하고 학업에 전념하다가,
1259년, 따렌따시아의 베드로와 토마스 아퀴나스와 더불어 도미니꼬회의 새로운 교과 과정을 작성하였다.
그의 소망에 반하여 그가 1260년에 로젠부르그의 주교로 서임되었으나,
쾰른에서 가르치기 위하여 2년 후에 사임하였다.
그는 1274년의 리용 공의회에서 크게 활약하였는데, 특히 그는 로마와 희랍 교회의 일치에 공헌하였다.
또한 알베르토는 1277년, 파리의 스테파노 땅피엘 주교와 그 대학의 신학자들에게 대항하여
아퀴나스와 그의 입장을 옹호한 사건도 유명하다.
그 당시 알베르토는 소위 만물박사로 통한 듯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아우구스티노 학파의 저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방대한 지식을 가진 다작가였다.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에 앞서 그의 철학과 신학을 종합하는 업적에 전초를 놓았습니다.
주요저서로는 "신학대전" "피조물에 관한 대전"등이 있다.
그의 저서에는 성서와 신학 일반은 물론 설교,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물리학까지
두루 섭렵한 논문들이 많이 있으며,
그의 관심은 천문학, 화학, 생물학, 인간과 동물의 생리학, 지리학, 지질학, 그리고 식물학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특히 인간 이성의 자율성과 감각-경험으로 얻는 지식의 유효성 및 조직 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가치 확립 등이 돋보인다. 아퀴나스는 이런 종합을 완성한 신학자이다.
성 알베르토는 1931년, 비오 11세에 의해 교회 박사 칭호와 더불어 시성되었고,
자연 과학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한 마디로 그는 위대한 자연 과학자들 가운데 최초의 위인이었다.
(부산대교구홈에서)
성 대 알베르토 주교 학자
S. Albertus Magnus (1206경~1280)
도미니칸-주교-교회 학자
알베르토 성인은 스콜라학파의 학자이며 설교자회 (도미니코 수도회)회원이고, 박학다식했기 때문에 `대 알베르토'(Albertus Magnus)라고 지칭되었다. 남독일 슈바벤 지방의 라우잉겐에서 볼슈테드 백작의 아들로 1206년경 태어났다. 후에 그의 학문적 저술들에 나타났던 그의 예리한 관찰력은, 이미 유년시절 아버지의 성 근처의 숲 속에서 처음 길러 진 것이었다. 그곳에서 그와 그의 형제 헨리코 (그 역시 설교자회원이 되었다)는 매와 사냥개를 데리고 사냥을 했으며, 매를 잘 다루었다.
알베르토는 이탈리아의 법학의 명문 볼로냐 대학교와 자연 과학의 명문인 바도바 대학교 및 신학의 명문인 프랑스의 파리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특히 그는 바도바에서 새로운 학문의 분야를 연구했다. 바도바에서 많은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였는데, 1223년, 새로운 수도회인 설교자들의 수도회의 총장이었던, 독일인 삭소니의 조르단을 알게 된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알베르토는 이 수도회에 입회하려고 했지만 가족들이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굳건한 의지와 신념을 가지고 나중에 그는 결국 입회하게 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시기에 알베르토의 학문적인 위대함과 성모님에 대한 사랑이 뛰어났다. 그는, 그가 함께 공부하고 있는 형제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오랫동안 설교자회의 횐 수도복을 입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그가 관심을 두는 분야에는 무엇이나 이해할 수 있었지만, 추상적인 학문은 그에게 너무 어려웠다. 결국 그는 그 모든 것에서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어느날 그가 조용히 떠나려고 결심을 하고, 담벼락에 조심스럽게 사다리를 새워 놓고 기회를 기다렸다. 그가 담을 넘기 전에 마지막으로 성모송을 한 번 바치려고 무릎을 끓었을 때에, 갑자기 성모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다. 성모님께서는 알베르토가 원하는 것을 왜 당신께 청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알베르토가 당신을 잊은 것을 나무라신 후에, 성모님은 그가 그렇게도 갈망했던 학문의 은총을 그에게 주시고는 사라지셨다. 이러한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이야기의 진실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알베르토가 성모님께 얼마나 깊은 신심을 가진 학자였는지를 볼 수 있다.
알베르토는 대단한 탐구정신을 갖고 있었다. 당시 경험적 지식은 모두 의심에 처해지던 시대에, 그는 실험하고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었으며, 당시의 과학은 지금보다 훨씬 뒤떨어진 것이었기에 오늘날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지는 않았었으나, 그의 예리함과 정밀함은 그의 관찰을 소중한 것이 되게 했다. 그는 식물학, 천문학, 화학, 물리학, 생물학, 지리학, 기상학, 윤리학, 수학, 논리학, 수사학, 경제학, 정치학, 형이상학 등에 대한 많은 글을 썼다. 그는, 지도와 도표를 만들고 식물들을 실험했고, 화학 반응을 연구했으며, 항해를 돕기 위한 기구들을 고안했고, 해와 동물 등을 자세히 연구했다.
1228년에 알베르토는 교수로 독일로 보내어 졌다. 그는 힐데스하임, 프리부르그, 라티스본 및 쾰른 등을 거쳐 1245년부터 파리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1248년에는 다시 쾰른으로 돌아와 도미니코회의 대학과 비슷한 `스투디움 제네랄레(Stadium Generale)'를 조직하였다. 알베르토가 퀼른과 파리에서 가르치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그곳에서 “시칠리아의 말못하는 황소”라고 불리우던 말없는 학생이 장차 다른 모든 별들보다 더욱 밝게 빛날 별인 토마스 아퀴나스를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장차 영원의 지혜를 펼쳐놓을 수 있도록 격려하고, 그가 심오한 진리로 향한 문을 열도록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하기에 그는 큰 겸손과 큰 성덕을 필요로 했을 것이며, 알베르토는 이것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학문적 업적 뿐만 아니라, 수도회와 교회 안에서 탁월한 리더쉽을 보여주었다. 그는 1254년에 독일 북부의 테우토니아 관구장으로 선출되었고, 3년 동안 관구 형제들을 지혜롭게 인도했다.
그리고 그는 1256년 교황 알렉산데로 4세의 요청으로 아베로이즘 [어떤 명제는 철학적으로 진실이라 해도, 신학적으로는 잘못일 수도 있다는 설]을 반박하는 책을 썼다. 그 해에 또 보나벤투라와 함께 로마 교황청에 가서 탁발 수도회가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반대하던 센트 아모르의 기예르모를 비롯하여 파리 대학교 교수들과 논쟁을 하며, 교황 앞에서 탁발 수도회가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수도회의 권위를 수호했다.
1260년, 알베르토는 탐탁치는 않았지만 교황의 명에 순명하여, 알렉산드로 4세 교황으로부터 라티스본의 주교로 임명을 받았다. 그는 라티스본 교구를 조직하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평화와 화목을 도모하고, 2년 동안에 교구를 개정하고 일을 정리하다가, 수도생활에 대한 그리움과 저작에 전념하기 위해 주교직을 사임하였으나, 1274년 리용공의회에 참석하는 등 교회 안에서의 봉사는 계속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알베르토는 1277년 파리에서 제자 아퀴나스의 교리를 옹호하기도 하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rationes seminales'를 신봉하는 아우구스티노 학파의 저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방대한 지식을 가진 다(多)작가였다. 또한 아퀴나스에 앞서 그의 철학과 신학을 종합하는 업적에 전초를 놓았으나 아퀴나스의 저작에서 보이는 유기적인 통일성이 부족하였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신학대전〉, 〈피조물에 관한 대전〉이 있다. 단테는 그를 아퀴나스와 함께 ’예지자‘로 불렀다.
그는 많은 저서들을 남기고, 오랫동안 자신의 일에 몰두하다가 쾰른 수도원에서 1280년 12월 15일에 평화스럽고 온화한 모습으로 하느님께 영혼을 바쳤다.
그는 1931년 12월 16일에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만물박사(全科目博士, Doctor Universalis)로 불리워졌다. 이보다 �선 1893년에는 빈곤한 가톨릭 학생의 후원을 목적으로 알베르토 마뉴스회(Albertus Magnus)가 창립된 바 있다. 그 뒤에 1941년 비오 12세가 자연과학자들의 수호자로 공포하고 그의 지인 로만스의 움베르토 총장에 의하면 ‘그는 영적으로 위대한 영혼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사업과 봉사를 하기에 더욱 적합하도록 그는 키가 높고 잘 생겼을 뿐만 아니라 힘도 세었다’고 전한다.
“모든 인간의 진리가 하느님의 말씀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존경심으로 발견해야 한다”라는 성 유스티노의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던 알베르토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와 진리를 끊임없이 찾았으며, 그는 모든 것을 인간의 지혜와 신앙으로 조화시켰기에 “대(大, 라틴어 Magnus)"를 이름 앞에 붙여서 ‘대 알베르토’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겸손한 교수 알베르토는 가르칠 때 항상 아무도 단죄하지 않고 “어떤 의견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해주며 그의 제자들을 격려하였다. “기도를 하기 위하여 준비해야 한다” , “하느님을 기억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기도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설교자는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해명해야 한다”등 그는 이와 같은 말들을 하며, 자기의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좋은 모범이 되어 준다.
(천주교설교자회.도미니코수도회홈에서)
update.2004.11.15
♬Ave Verum-Moz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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