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정원/Christian Music

가시나무/ 작사: 하덕규, 작곡:하덕규, 편곡: 이경섭 & 최태완

엔비53 2015. 3. 2. 00:12

 

 

 

'Bougainvillea' taken by 아침정원 [At 8:30 A.M., Feb. 24, 2015, 북쪽산에 눈이 내렸음.]

 

 

가시나무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이 없네 내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한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없네

가시나무/ Unknown Singer

 

가시나무/ 시인과 촌장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아 [사도행전 10장 9절 ~ 16절 말씀] - 장찬영 목사

 

 

(1). 1981년 결성된 혼성듀엣 가수가 있습니다. 바로 [시인과 촌장]이라는 그룹입니다. 이 멤버 중 하 나가 하덕규씨라고, 찬양사역자와 방송인으로, 지금은 백석대학교에서 실용음악과 교수로 계신 분 입니다. 제가 이 분을 몇 번 만나게 되었고, 이분의 개인적인 간증을 들으면서 참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 그룹의 이름이 [시인과 촌장]인데, 이 분의 말에 의하면, ‘시인’은 이상적인 삶을 ‘촌 장’은 지금의 현실적인 삶을 가리키는 말로, 당시 그 가운데 끼어있는 자신의 모습과 당시 7080시 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시인과 촌장]의 히트곡인 ‘가시나무’의 가사는 원래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 신앙적인 고백이었다고 합니다.

 

그 노래 ‘가시나무’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자, 노래를 들어보세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2). 자, 오늘 본문 사도행전 10장은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을 무너뜨렸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은 도무지 무너질 수 없는 견고한 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으로 해결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와 그 가정에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 로가 깜짝 놀랍니다.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는가? 놀랍게도 이 사건을 계기로 복음은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셨습니다.

 

그러나 기가 막히게도 이 하나님의 계획은 마땅히 복음을 전해야 되는 제자들의 마음 안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 안에 있는 이방인에 대한 ‘편견(prejudice)’이었습니다. ‘편견’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공정하지 못하고 한 쪽으로 치우친 생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편견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분노합니다. 외국에 와서 사는 이민자들에게 편견은, 차별과도 같이 참을 수 없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솔직히 물어봐야 합니다. “나는 정말 공정한가? 나는 정말 편견이 없는가? 나의 생각, 가치관, 기준은 정말 건강한가?”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가기까지 적지 않은 갈등을 겪습니다. 얼마나 힘들었는가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욥바에서 기도하던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온갖 짐승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동물들은 유대교 전통과 법에 의하면 부정한 짐승들이었습니다. 먹지 말아야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리가 들리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그러자, 베드로가 말합니다. 14절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Surely not, Lord! I have never eaten anything impure or unclean.

 

베드로의 반응이 생각보다 강합니다. 분명 기도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는데도 단호하게 안 먹겠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고집, 편견이 얼마나 완강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때 두 번째 소리가 들렸습니다. 15절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Do not call anything impure that God has made clean.

 

16절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성경은 주님의 제자인 베드로도 이러한 편견을 가졌다고 증거합니다. 그러나 이 편견이 고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편견은 곧 깨달음과 위대한 선언으로 바뀝니다. 이 선언이 복음의 진로를 바꾸게 합니다. 베드로 개인에게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비전선언서가 됩니다.

 

34-35절 “하나님은 참으로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 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Then Peter began to speak: "I now realize how true it is that God does not show favoritism but accepts men from every nation who fear him and do what is right.

 

이것은 바로 복음의 결과가 어떠한 모습인지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름 이렇게 은혜도 경험하고, 훈련도 받고, 기도생활도 하는데 여전히 우리의 가치와 기준, 이 ‘왜곡된 편견’은 여전히 내 안에 깊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편견’이라는 것이 결코 만만하지 않은 사단의 진이라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 편견은 예수를 주인으로 영접하는 순간, 회복되어야 할 ‘상처받은 마음’이지만, 동시에 이것은 가장 치열한 ‘영적전쟁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3). 여러분도 그러시겠지만, 저는 가끔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서 속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한 마디로 정의하라고 하자, 적지 않은 사학자들이 ‘당쟁의 역사”라고 얘기했습니다. 믿기지 않지만, 지난 주간에 우리나라 여야 국회의원들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설립된 이후, 한 번도 같이 사진을 찍지 않았다가 지난 주 찍는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해도 너무 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 당쟁도 '논리의 변혁'으로 나름 좋은 것이라고 두둔하지만, 그렇게 나라의 리더들이 자기 당착과 편견에 빠졌을 때, 백성들은 굶어 죽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인 ‘유식한 편견’ 말고도 사실 우리가 살면서 갖게 되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유치한 편견’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유치한 편견은 거룩한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 한 아이가 엄마와 함께 교회에 왔다가 너무 급하여서 그만 성전에서 놀다가 한쪽 구석에 응가를 하였습니다. 엄마에게 얘기를 하면 혼날까 봐 얘기를 못하였습니다. 다음 날, 새벽에 한 분이 가장 먼저 성전에 들어왔는데, 이상한 냄새가 납니다. 보니까 세상에, 성전에 똥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두운 데서 보니 이게 어른 똥 같습니다. 순간 여러 생각들이 스칩니다. “누가 갖다 놓았나? 아니면 누가 일부러 성전에다 이런 짓을 했나?” 가뜩이나 요즘 교회가 어수선한데 드디어 이런 일이 일어났구나,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건 교회의 질서의 문제이며, 영적인 도전이지... 그래서 이 사실을 예배부장, 재단이사장, 장로님들에게 연관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다 알렸습니다. ‘핫 이슈! 성전에 똥 투척 되다!’ 이 사실이 심각해지자, 임원회에 상정되어 이 사건을 위한 진상조사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은 지난 시간의 경험을 가지고 이 사건을 추적해 나갔습니다. ‘범인은 반드시 현장에 다시 온다’ 그리고 대변의 색깔, 온도, 크기 등을 조사하고, 지난 밤 성전에 누가 제일 늦게까지 있었는지, 또 누가 성전 키를 가지고 있는지. 좁혀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용의자 명단에 오른 사람들의 이름이 올려지고 소문이 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얘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통해 온 땅에 퍼져나갑니다. 그 사이 교회는 서서히 갈라져 교인끼리 서로를 의심하게 되어 편이 갈리고, 마침내 임원회에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더욱 강력한 policy와 규제를 만들어, 성전 문을 잠그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이 말도 안 되는 코미디 같은 일이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 문제는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그날 새벽에 처음 똥을 본 사람이 “아니, 웬 똥?” 한번 놀래주고, 그냥 치우면 되는 겁니다. 똥은 조사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치우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 교회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방치하면 안 됩니다. 같은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하실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또 누가 다시 똥을 싸 놓으면, 또 치우면 되는 것입니다. 똥을 갖다 놓는 사람보다, 그것을 치우는 사람이 많으면 되는 것입니다.

 

가만 보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이 용서함 받은 후에도 또 다시 죄를 짓고, 반역하고 배역할 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또 다른 법과 규정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 더 은혜로 우리의 죄를 치우셨습니다. 루머는 루머를, 논쟁은 논쟁을, 법은 법을 낳고, 용서는 용서를 은혜는 은혜를 낳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4). 자, (이런 가운데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은 이런 우리의 이런 병들고 왜곡된 편견이 좀 덜 인격적이어서, 좀 덜 배워서, 좀 덜 성숙해서 그렇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전 존재가 얼마나 타락한 죄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어찌할 수 없는 자신, 이것을 가리켜, '전적 타락'(total corruption)이라고 합니다.

 

즉, ‘전적 타락’이란, 우리에겐 조금도 선한 것이란 없고 내가 하는 것은 다 죄고, 우리는 이 세상 가장 흉악하고 저질스런 자와 사실상 같은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동의하실 수 있습니까? 아마 동의하기를 주저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목사님, 저는 그렇지는 않는데요. 제가 죄인인 것은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악질은 아닙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나는 그래도 조금은 선하다”고 하실 수 있습니까? 남편에 대해서 좋은 점수를 주시고 싶은 분들이 꼭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목사님, 그이가 교회는 안 나가도 법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자녀를 두둔하고 싶어하는 부모님들이 꼭 하시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 우리 아이는 그럴 아이가 아닙니다. 그저 친구들 잘못 만난 죄 밖에는 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성경은 이런 우리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롬3:23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선언하십니다.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고 선언하십니다. 롬1:28-31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에는 어린 아이도 예외가 아닙니다. 나름 선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는 분도 예외가 아닙니다. 스스로를 고상하다고 생각하는 분도, 그래도 지식과 상식이 있는 분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런 나의 전 존재가, 나의 죄성이 어느 정도 악질인가 하는 것은, 이런 나 대신 지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반증합니다. 내 존재가 하나님 빛 아래 보여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벌거벗은 참담한 모습을 보게 되고, 내가 얼마나 악하고 약한지를,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힐 분은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 앞에 드러난 나의 모습’입니다. 복음은 바로 내가 그런 존재임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이 ‘어찌할 수 없는 본성’에 대하여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선포합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5). 그리고 이 ‘저항할 수 없는 주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고후10: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We demolish arguments and every pretension that sets itself up against the knowledge of God, and we take captive every thought to make it obedient to Christ.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 전해졌던 1800년도 말에는 예배당이 평양에만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믿음 좋은 여자 교우가 평양에서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를 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사를 했지만 평양에서 진남포까지는 너무 거리가 멀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지만 그 여인은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두 아이를 데리고 토요일에 출발해서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월요일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두 아들이 달구지에 짐을 싣고 가다가 막대기가 튕기는 바람에 옆을 지나가던 말에 탄 노인을 말에서 떨어지게 하고 말았습니다. 말에서 떨어진 노인이 심하게 다쳤기 때문에 두 아들은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경관이 누가 그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두 아들이 서로 자기가 그랬다고 그러는 겁니다. 형은 동생은 아무 잘못이 없으니 나를 벌주라고 하고 동생은 막대기는 내가 들고 있었고 내가 떨어뜨린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자기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형과 동생이 서로 책임을 지려고 하니까 난처해진 경관이 어머니를 불러서 ‘어머니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어머니, 믿음좋은 여자교우가 이러더랍니다.

 

“벌을 받을 바에야 작은 아이에게 주십시오.” 경관이 “하필이면 왜 작은 아이요?”하고 따져 묻자, 그 여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으리, 제가 이 집으로 다시 결혼해서 개가(改嫁)를 했는데 큰 아이는 전처의 소생이고 작은 아이가 제가 낳은 아들입니다. 그러니 작은 아이를 벌 주십시오.”그러자 경관이 이 말을 듣고 놀라면서 물었습니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오?” “예수 믿는 사람이올시다.” “예수 믿으면 다 당신처럼 되오? 내가 돈을 댈 테니 이 진남포에 예배당 하나 세웁시다. 그리고 이제는 여기서 예배 드리시오. 나도 그 교회라는 곳, 한 번 다녀 봅시다.”

 

사람들의 마음에 충격과 도전을 주는 것, 이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이 땅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그렇습니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으면, 내 방식대로 내 기준으로, 내 정의로 살게 됩니다. 복음은 아는 데서 그치면 안 됩니다. 복음이 내 안에서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아멘.

 

글쓴이: 장찬영 목사, 디트로이트한인연합감리교회, Michigan주
올린날: 2014년 2월 11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

 

http://www.koreanumc.org/resources/too-many-in-me

 

 

Acts 10:9-16(NIV)

Peter’s Vision

9. About noon the following day as they were on their journey and approaching the city, Peter went up on the roof to pray. 

10. He became hungry and wanted something to eat, and while the meal was being prepared, he fell into a trance. 

11.  He saw heaven opened and something like a large sheet being let down to earth by its four corners. 

12.  It contained all kinds of four-footed animals, as well as reptiles and birds. 

13.  Then a voice told him,“Get up, Peter. Kill and eat.”

14.  “Surely not, Lord!” Peter replied. “I have never eaten anything impure or unclean.”

15.  The voice spoke to him a second time, “Do not call anything impure that God has made clean.”

16.  This happened three times, and immediately the sheet was taken back to heaven.

 

 

'Snow on the mountains of Southern California' taken by 아침정원

[8:30 A.M., Feb. 24, 2015,  Mt. Baldy에 눈이 내렸음.]

 

 

**************************************Added on 3/5/2015**************************************

 

 

Hummingbird 찜질방!ㅎ

 

PST으로 오늘(3/5/15, 아침)에 hummingbird가 목욕하는 모습. 처음에는 날 피하다가...

 

 

날 잠시 피하다가 에라모르겠다는 식으로 지 맘대로 물장구를 치는지 목욕을 하는지~~ ^^

 



 

옆 나무가지로 건너가서 몸을 말린다. 여기도 봄이 왔다고 새 이파리가 보인다.

 

 

 

 

집 가까이에 있는 딸기밭. 주위의 높은 산에 눈이 덮여도 딸기가 무르익어가니 자랑거리다.

 

위에 보인 우리동네 딸기밭에서 파는 딸기.

 

 

이 사진은 풀잎사랑님 보시라고 Godiva에서 빌려온 사진.

A Godiva Signature. The chocolate dipped strawberries...

 

 

동네 곳곳에 소나무가 있는데 매년 이맘때면 송화가 피어나고 나는 이 시를 두렁두렁~~

 

 

무당벌레(ladybug/ladybird)가 보이나요?

 

 

 

 

이층 방에서 보이는 view.

나무가 점점 커지니 산이 가리워져서 아쉽다.

이웃들에게 나무를 자르라고 할 수 없으니 보이는 곳으로 내가 이사를 가야지. (나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