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수필 대상작> 어머니와 아들
김철환 평택 새서울의원 원장
1990년 초겨울, 내가 의예과 시절을 보냈던 전남대학교 5·18광장. 하늘은 곧 눈이라도 내릴 것처럼 잔뜩 흐렸는데 나는 광장 한가운데 잔디밭에 드러누웠다.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머리가 핑 돌며 땅속으로 처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생애 첫 담배 한 모금이었다. 의예과 마지막 기말 고사를 얼마 앞두고, 갑작스런 뇌출혈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신을 땅에 묻어 드리고 학교로 돌아온 그날이었다.
사춘기 시절 집안은 아버지의 거듭된 사업 실패로 힘들어졌고, 그럴수록 어머니와 자식들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과 폭압도 더욱 심해졌다. 중학교 2학년 때 분노를 참지 못한 내가 집안의 물건들을 집어 던지고 유리창을 깨뜨리며 대들자 아버지께서는 집을 나가셨다. 그리고 3일 만에 돌아오셔서는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선언하셨다. 그 후로 그 말은 내 영혼을 갉아 먹는 저주가 됐다.
대학생 시절에도 의사가 될 생각은 없었고, 그 당시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퇴보하기 시작한 학생 운동의 끄트머리를 나는 아직 놓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길을 잃고 있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자 나는 도망치듯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 후 5년이 지나서야 어머니는 당신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토록 무심했으며 혼자가 된 어머니는 구멍가게를 운영하며 겨우 생계를 꾸려 나가고 계셨다.
다행히 인턴, 레지던트 수련 과정은 내가 의사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해 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중환자실, 응급실, 입원실의 환자들 곁에서 늘 느껴야 했던 한계와 절망, 성취와 희망은 내게 삶에 감사하고 포용하는 법을 가르쳐줬다. 조급하고 관념적인 학생 운동의 허물을 벗고, 구체적인 삶과 세상 속에서 겸손하고 따뜻한 의사로 살고 싶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꼭 10년 만인 2004년, 경기도 평택시 외곽 시골 마을에 내 개인 의원을 열게 됐다.
이 마을은 1951년부터 형성된 유서 깊은 미군 기지촌이었다. 여기 저기 걸린 영어 간판과 거리를 활보하는 흑백의 병사들, 필리핀·러시아 등지의 여자들로 거리에는 이국적인 활력이 넘쳤다. 금요일 밤이면 미군 전용 클럽들이 즐비한 거리를 수백 명이나 되는 미군들이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면서 몰려다니는 풍경은 왠지 낯설고 두려웠다.
3년 반을 하루도 쉬지 않고 밤늦게까지 진료를 했다. 힘든 병원 일 때문에 직원들도 오래 버티질 못하고 말썽을 피우는 경우가 많았고, 기지촌 주민들은 거칠고 억셌다. 하루하루가 숨 막히는 전쟁 같았다. 마침내 나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내 일생 처음으로 고향에 계신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어머니, 올라오셔서 밥 좀 챙겨 주세요!” 이 말이 다였다. 하지만 아들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으리라! 어머니는 구멍가게 문을 닫고 바로 짐을 챙겨서 올라오셨다.
아무 질문도, 타박도, 꾸중도 없으셨다. 그저 매일 아침저녁을 챙겨 주시고, 정화수를 앞에 놓고 지극한 기도를 올리셨다. 마음을 평온하게 해 준다는 향불이 항상 켜져 있어 향내 가득한 집안의 온기가 내게 조금씩 안정을 찾아 줬다. 고맙게도 어머니는 내 삶의 가장 큰 고비를 함께 넘어가 주셨다.
그 즈음에 특별한 환자를 만나게 됐다.
그는 흑인 혼혈인 ‘성철’ 이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미국으로 돌아가버린 주한 미군 병사였다고 한다. 지금은 20대 중반인데, 어릴 때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친 후 후유증으로 간헐적인 간질 발작과 하반신 마비, 퇴행성 정신 장애로 고생하는 녀석이었다.
한번은 진료 대기 중이던 우락부락한 남자가 접수 과정에서 불쾌한 일이 있었는지 간호사에게 심한 욕을 하며 화를 냈다. 그러자 바로 옆에 있던 성철이 휠체어를 힘껏 굴려서 욕해 대는 남자의 허벅지를 때려 넘어뜨렸다. 그는 정말로 못 견디겠다는 듯이 “요욕하지 마아아! 괴괴롭히지 마앗!”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있던 그의 어머니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하지만 불을 뿜는 그의 눈빛과 단호한 목소리에 그 남자는 민망한 모습으로 병원을 나가야 했다.
이 일로 성철은 간호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조용히 다가가 볼에 뽀뽀를 하기도 하고, 뽀뽀를 해 달라고 터무니없이 응석을 부리기도 했다. 성철의 티 없이 환하게 웃는 모습과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은 피부색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마음을 열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사슴같이 맑고 하얀 눈동자는 까만 얼굴에 박힌 커다란 보석처럼 빛났지만, 가끔 병원 밖에서 휠체어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모습에는 금방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깊은 슬픔과 고독이 묻어 나왔다.
무척이나 덥던 8월의 어느 날, 시골 마을 전체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성철이 방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라이터를 켠 것이 어떻게 불이 옮겨 붙어서 그와 어머니가 사는 집을 몽땅 태워 버린 것이다. 다행히 그와 어머니는 무사히 빠져 나왔고, 옆의 가옥으로 불이 옮겨 붙지는 않아서 더 이상의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한밤중에 온 동네가 깨어났고, 그와 어머니는 근처 교회로 가서 쉬고 있다는 것이었다. 병신 아들 때문에 어머니가 죽을 고생하고 산다는 투의 동정 반 비난 반인 수군거림이 끊이질 않았다.
오후에 성철의 어머니가 병원으로 찾아왔다. 발바닥과 발목 쪽으로 화상을 입어 여기 저기 수포가 생겨 있었다. 여태 병원에서 치료도 못 받고 화재 뒷수습을 하느라 뛰어다닌 모양이었다. 상처를 먼저 치료하자고 했더니, 성철의 약을 불 난 집에 두고 나와서 약을 못 먹였다며, 전에 나한테서도 처방 받은 적이 있는 간질약 처방을 부탁했다.
난 잊을 수가 없다. 여기저기 불에 까맣게 그을린 신발과 옷, 고통도 원망도 두려움도 없는 무심한 표정으로 아들의 처방전을 기다리던 얼굴을. 그 순간만큼은 성철의 어머니가 사람의 모습을 초월한 어떤 경이로운 존재로 느껴졌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에 성철과 어머니가 마을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화재 사건 이후 그들은 이웃의 기피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마을과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집을 마련하고 어머니가 소작 농사, 허드렛일 등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누군가가 전해주었다.
그로부터 또 한 1년이 지난 가을에 쌀가마니를 들고 성철의 어머니가 병원으로 찾아왔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잡고 근황을 물으니, 그동안 ‘대추리(大秋里)’라는 곳에서 소작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미군 부대 확장으로 땅이 수용되면서 정부에서 서산 쪽 어딘가에 마련해 준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고 한다.
“성철은 어떻습니까? 힘드시죠?”
“잘 지내고 있습니다. 힘들기는요, 오히려 제가 살 힘을 얻는 걸요. 그 아이가 아니었으면 벌써 저 세상 갔을 겁니다.”
병원 밖에서 헤어지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멀어져 가는 그녀의 등짝이 왜 그렇게 크고 든든해 보이는지…!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후론 두 모자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내 어머니도 힘겨운 시집살이와 아버지의 폭압에 시달릴 때면, 아무도 몰래 초등학교 교실을 찾아가서 창문 너머로 아들의 해맑은 모습을 보고 힘을 얻어 돌아왔다고 한다.
어미와 자식은 서로를 연결해 주던 탯줄이 끊어진 후에도 보이지 않는 생명줄로 연결된 존재가 아닐까? 성철과 그의 어머니, 나와 내 어머니도 그 생명줄을 붙들고 모진 삶을 견디고 이겨 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까지 왔을 것이다.
올 겨울 아버지 기일에 어머니와 함께 산소에 들렀다. 채석장 옆 험한 돌산에 만들어진 아버지의 무덤은 20년이 지나도록 황량하기만 하다. 붉은 천에 덮힌 목관에 마지막 흙을 뿌릴 때, 원통하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도 나지 않고 이를 딱딱 부딪치며 떨던 기억이 생생하다.
무덤가로 겨울 까치가 ‘까깍’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까치가 사라지는 산 너머로 아버지와 성철 모자의 얼굴이 함께 떠올랐다. 모두들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제 만날 수는 없지만, 성철과 그의 어머니는 지금도 어느 들판 어느 거리에선가 천천히 휠체어를 타고 밀면서 함께 노래하고 웃고 있으리라! 누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둘의 동행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나도 오랜만에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산길을 걸어 내려왔다. 생전에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희망가’를 어머니가 흥얼거리셨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수상수감- 김철환(평택 새서울의원)
수상 소식을 받은 날 새벽, 첫눈이 내렸습니다. 뒤척이다가 깨어나 창밖을 보니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내면에 감춰 둔 아픈 상처들을 드러낸 글이라 응모하는 데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글로 써서 세상에 내놓고 보니 새벽녁에 바라 본 눈 덮인 세상 풍경처럼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이제 과거의 경험과 상처에 연연하지 않을 만큼 성숙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의 관심은 사람의 아픔이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엔 아픔이 너무 많았고 제 감수성은 그걸 표현하고 나누고 싶었습니다.
글쓰기는 세상을 보는 창이었고 아픔을 보듬고 이기는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이번 수상으로 저의 창이 더 넓어지고 더 큰 용기를 얻게 된 것 같습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생각해보면 참 많은 인연과 경험 속에서 사랑받고 격려 받은 인생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더욱이 3살 된 딸을 키우다보니 결국 사람이란 수많은 이들의 수고와 노력의 결정체임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 속에서 진료실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행복을 누리고 싶어집니다.
진료실에 삶의 온갖 아픔을 안고 찾아오는 환자들로 인해 매일 괴롭고 매일 행복합니다. 아픔의 진실과 삶의 비밀을 일깨워주는 제 환자들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아들이 의사가 되는 걸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께 늦었지만 다시한번 용서를 구하고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언제고 제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신 어머니께는 이번 수상의 모든 영광과 기쁨을 돌려야겠습니다. 어머니, 언제고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 장인 장모님과 가족 모두에게 따뜻한 사랑과 감사를 보냅니다.
2012년 모두들 행복하고 건강한 한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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