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정원/나누고싶은 글

민주주의의 성지인 광주가 외로움에 빠졌다

엔비53 2012. 12. 27.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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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철>
• 1960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시작된 4.19 민주화운동
1980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시작된 5.18 광주민주화운동

무엇이 다르더냐...
민주주의를 위해 선혈이 낭자했던 그 시절 그 시대에, 모두 하나인데.

민주주의의 성지인 이곳은, 이제 외로운 '전라도'가 되어간다.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문재인 후보에게도 지역적 감정이 아닌, 민주주의적 생각과 감정으로 소중한 주권을 행사한 국민들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외로운 '전라도'는 오직 민주주의만 생각했다는것을 잊지 말자.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는게 옳다고 본다. 아직까지는.

대선 후 더 외로워진 전라도가, 그리고 광주가..침묵속에서 이전보다 성숙하고 강한 힘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다시 의연히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전라도’를 위하여
[정운현 칼럼] 대선 패배 후 ‘섬’이 되어 ‘기괴한 침묵’에 빠진 전라도

정운현 기자 | 등록:2012-12-26 09:20:14 | 최종:2012-12-26 10:38:48



크게 봐 경상도와 전라도는 북쪽의 덕유산과 남쪽의 지리산을 사이에 두고 동서 이짝 저짝으로 나뉜다. 지리산 동쪽의 함양, 산청, 하동은 경상도, 서쪽의 남원, 곡성, 구례는 전라도다.

경남 함양 태생인 필자는 어린 시절 경상도와 전라도를 구분하지 못했다. 아니 굳이 구분할 필요도 없었고 또 구분되지도 않았다. 날씨 좋은 날 툇마루에 서면 저멀리 우뚝 솟은 지리산 천왕봉이 보였고,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위천)의 뒷산 너머는 전북 남원땅이었다.

마을에서 읍내 쪽으로 십리 거리에 있는 장터 이름은 ‘물나드리’였는데, 남원 쪽에서 내려오는 냇물과 고향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이 서로 나고 드는 곳이라는 뜻이다. 물나드리에서 고개를 하나 넘으면 남원의 아영, 인월, 운봉면으로 이어진다.

교통이 불편하던 그 시절엔 고개 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길로 88고속도로가 쌩쌩 내달린다. 그 시절에도 고개 이짝 저짝은 서로 한 동네처럼 지냈으며 혼사도 잦았다. 우리 외가도 거기 있다.

 내가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마을 전경. 그 시절엔 경상도-전라도 구분이 없었다.  


그런데 열 살 때 온 식구가 대구로 이사를 나오면서 전라도를 잊었다. 그리고 청년기를 대구서 보내면서 나는 ‘진짜’ 경상도 사람이 되었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80년 가을에 입대했는데 배치를 받고 보니 자대가 부산이었다.

졸업 후 장가는 경북 안동으로 가게 됐고, 첫 직장은 경상도 기업인 삼성그룹 계열의 신문사였다. 내가 타는 기차는 당연히 경부선이었고, 회사 모임 동창회 모임도 가보면 모두 경상도 출신이었다. 내 주변엔 온통 ‘경상도’ 뿐이었다.

전라도 땅 광주를 처음 가본 건 2002년 대선 때였다. 굳이 따지자면 그 이전엔 갈 일이 없었다. 내 생활의 배경은 ‘경상도’였기 때문이다. ‘광주학살’의 현장인 옛 전남도청 앞 충장로에도 가보았고, 5.18국립묘지에도 가보았다.

땅도 말도 모두가 낯설었고 나는 마치 이방인(異邦人) 같았다. 그러던 것이 그해 대선 열풍을 계기로 나는 처음 전라도를 내 가슴에 품게 되었다. 고마운 땅, 고마운 사람들이라는 걸 내 나이 40중반이 돼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올 대선이 끝난 지 일주일째,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세상은 평온해 보인다. 그러나 한 꺼풀만 벗겨 보면 상처투성이다. 세대별로 찢겨지고 계층별로 나뉘고 여기에다 지역별로도 확연히 갈렸기 때문이다.

크게 봐 5060-경상도는 박근혜를 밀었고, 2030-전라도는 문재인을 밀었다. 어느 쪽이든 그 나름의 이유와 명분이 있었겠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이번 대선이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의 골을 더욱 깊게 파놨다는 점이다.

따지고 보면 경상도와 전라도는 ‘둘’이 아니었다. 이순신 장군이 전라도에 수군 본거지를 두고 있었대서 경상도를 나 몰라라 하지 않았고, 구한말 의병은 영남과 호남 모두에서 일어나 국운을 되살리고자 했다.

경상-전라가 둘로 나뉜 건 박정희-김대중이 맞붙은 1971년 대선 때부터였다. 이후 내리 40년을 경상도 정권이 이어왔고, 겨우 한 차례 김대중의 호남정권이 스치듯 지나갔다. 전라도는 늘 변방이자 비주류였고 그로 인해 조선땅 한 쪽은 기울어졌다.

 표창원 교수가 광주에 '프리 허그'를 갔다가 광주시민들로부터 받은 선물들.(출처-표창원 블로그)


꼭 10년 전, ‘경상도 사람’ 노무현은 그런 적폐(積弊)를 청산하고자 했다. 전라도는 그런 노무현을 가슴으로 받아들였으나 노무현 정부는 전라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번 대선에서 ‘호남홀대론’이 그저 나온 게 아니다.

그럼에도 전라도는 다시 문재인에게 염치없을 만큼의 ‘몰표’를 몰아주었다. 그런 전라도가 지금 대선 패배로 ‘섬’이 되었고, 심지어 ‘기괴한 침묵’에 빠져 있다. 술자리에서조차 그 흔한 대선 패인 논쟁 하나 일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침묵을 강제하는 해괴한 ‘멘붕’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지난 22일 광주 충장로에서 열린 표창원 경찰대 교수의 ‘프리 허그’에 3000명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 경북 포항 출신의 이 낯선 이의 방문에 광주는 눈물겨워 했다. ‘박근혜 당선’이 확정된 20일 새벽, ‘직녀에게’를 부른 가수 김원중은 지인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난 밤 찬바람에 꽃잎 다 떨어졌겠다. 모양만 따스한 햇살에 모두 말이 없는 아침. 흩어진 꽃잎이 내 뺨을 때린다. 나 달게 맞겠다. 울지 마라, 광주!”

그 시각 전남 영암 출신의 조정 시인은 페북에 이렇게 썼다.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이가 악물어지는데 전라도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광주는, 전라도는 지금 지독한 외로움에 울고 있다.

* 26일자 <경남도민일보> 등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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