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정원/시, 산문 & 수필

[스크랩] 문정희 시 모음

엔비53 2017. 2. 8. 11:15

* 찔레 - 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 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 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 

 

* 오십세  

나이 오십은 콩떡이다
말랑하고 구수하고 정겹지만
누구도 선뜻 손을 내밀지 않는
화려한 뷔페상 위의 콩떡이다

오늘 아침 눈을 떠 보니 글쎄 내가 콩떡이 되어 있다
하지만 내 죄는 아니다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시간은 안가고 나이만 왔다
앙큼한 도둑에게 큰 것 하날 잃은 것 같다
하여간 텅 빈 이 평야에
이제 무슨 씨를 뿌릴 것인가
진종일 돌아다녀도 개들조차 슬슬 피해 가는
이것은 나이가 아니라 초가을이다
잘하면 곁에는 부모도 있고 자식도 있어
가장 완벽한 나이라고 어떤 이는 말하지만
꽃병에는 가쁜 숨을 할딱이며
반쯤 상처 입은 꽃 몇 송이 꽂혀 있다
두려울 건 없지만 쓸쓸한 배경이다 *

 

* 늙은 꽃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족의 자존심으로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필 때 다 써버린다
황홀한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 송이도 없다
피 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꽃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오묘하다
분별 대신
향기라니

 

* 지는 꽃을 위하여

잘 가거라, 이 가을날
우리에게 더이상 잃어버릴 게 무어람
아무 것도 있고 아무 것도 없다
가진 것 다 버리고 집 떠나
고승이 되었다가
고승마저 버린 사람도 있느니
가을꽃 소슬히 땅에 떨어지는
쓸쓸한 사랑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른 봄 파릇한 새 옷
하루하루 황금옷으로 만들었다가
그조차도 훌훌 벗어버리고
초목들도 해탈을 하는
이 숭고한 가을날
잘 가거라, 나 떠나고
빈들에 선 너는
그대로 한 그루 고승이구나 *
* 문정희시집[오라, 거짓사랑아]-민음사

 

* 눈을 보며
눈은 하늘에서 오는 게 아니라
하늘보다
더 먼 곳에서 온다

여기 나기 전에
우리가 흔들리던 곳

빈 그네만이 걸려 있는
고향에서 온다

첫 살에 부서지는 그대 머리칼이
반가운 것은
그 때문이다

한 생애에 돌아오는 목소리이다

우리들의 호기심
우리들의 침묵이 닿지 않는 곳

그렇게 먼 곳에서
눈은 달려와
비로소 한 조각의 빛깔이 된다 *

 

* 기억 
한 사람이 떠났는데
서울이 텅 비었다
일시에 세상이 흐린 화면으로 바뀌었다
네가 남긴 것은
어떤 시간에도 녹지 않는
마법의 기억
오늘 그 불꽃으로
내 몸을 태운다 *

 

* 겨울 일기 
나는 이 겨울을 누워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
염주처럼 윤나게 굴리던
독백도 끝이 나고
바람도 불지 않아
이 겨울 누워서 편히 지냈다

저 들에선 벌거벗은 나무들이
추워 울어도
서로 서로 기대어 숲이 되어도
나는 무관해서

문 한번 열지 않고
반추동물처럼 죽음만 꺼내 씹었다
나는 누워서 편히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이 겨울 *

 

* 유쾌한 사랑을 위하여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불꽃이다
삶은 순전히 불꽃인지도 모르겠다
시가 어렵다고 하지만
가는 곳마다 시인이 있고
세상이 메말랐다고 하는데도
유쾌한 사랑도 의외로 많다
시는 언제나 천 도의 불에 연도된 칼이어야 할까?
사랑도 그렇게 깊은 것일까?
손톱이 빠지도록 파보았지만
나는 한번도 그 수심을 보지 못했다
시 속에는 꽝꽝한 상처뿐이었고
사랑에도 독이 있어
한철 후면 어김없이
까맣게 시든 꽃만 거기 있었다
나도 이제 농담처럼
가볍게 사랑을 보내고 싶다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불꽃이다 

 

* 내가 화살이라면 
내가 화살이라면
오직 과녁을 향해
허공을 날고 있는 화살이기를


일찍이 시위를 떠났지만
전율의 순간이 오기 직전
과녁의 키는 더 높이 자라


내가 만약 화살이라면
팽팽한 허공 한가운데를
눈부시게 날고 있음이 전부이기를


금빛 별을 품은 화살촉을 달고
내가 만약 화살이라면


고독의 혈관으로
불꽃을 뚫는 장미이기를
숨 쉬는 한 떨기 육신이기를

길을 알고 가는 이 아무도 없는 길
길을 잃은 자만이 찾을 수 있는
그 길을 지금 날고 있기를 *

* 문정희시집[다산의 처녀]-민음사

 

* 돌아가는 길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 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

 

* 아들에게  

아들아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보다

 

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네가 어렸을 땐

우리 사이에 다만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사랑 한 알에도

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

너와 나 사이에는

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

 

* 쓸쓸 

요즘 내가 즐겨 입는 옷은 쓸쓸이네
아침에 일어나 이 옷을 입으면
소름처럼 전신을 에워싸는 삭풍의 감촉
더 깊어질 수 없을 만큼 처연한 겨울 빗소리
사방을 크게 둘러보아도 내 허리를 감싸 주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네
우적우적 혼자 밥을 먹을 때에도
식어버린 커피를 괜히 홀짝거릴 때에도
목구멍으로 오롯이 넘어가는 쓸쓸!
손글씨로 써 보네 산이 두 개나 위로 겹쳐 있고
그 아래 구불구불 강물이 흐르는
단아한 적막강산의 구도!
길을 걸으면 마른 가지 흔들리듯 다가드는
수많은 쓸쓸을 만나네
사람들의 옷깃에 검불처럼 얹혀 있는 쓸쓸을
손으로 살며시 떼어 주기도 하네
지상에 밤이 오면 그에게 술 한 잔을 권할 때도 있네
그리고 옷을 벗고 무념(無念)의 이불 속에 알몸을 넣으면
거기 기다렸다는 듯이
와락 나를 끌어안는 뜨거운 쓸쓸 *

 

* 순간  

찰랑이는 햇살처럼

사랑은 

늘 곁에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못했다

 

쳐다보면 숨이 막히는

어쩌지 못하는 순간처럼

그렇게 눈부시게 보내 버리고

그리고

오래오래 그리워했다 *

 

* 아름다운 곳  

봄이라고 해서 사실은

새로 난 것 한 가지도 없다

어디인가 깊고 먼 곳을 다녀온

모두가 낯잊은 작년 것들이다

 

우리가 날마다 작고 슬픈 밥솥에다

쌀을 씻어 헹구고 있는 사이

보아라, 죽어서 땅에 떨어진

저 가느다란 풀잎에

푸르고 생생한 기적이 돌아왔다

 

창백한 고목나무에도

일제히 눈펄 같은 벛꽃들이 피었다

누구의 손이 쓰다듬었을까

어디를 다녀와야 다시 봄이 될까

나도 그곳에 한번 다녀오고 싶다 *

* 1997년 소월시문학상 수상작

출처 : 숲속의 작은 옹달샘
글쓴이 : 효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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