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육성, 초월의 미학
이숭원(李崇源)
시는 서정 갈래에 속하는 문학 양식이다. 서정 갈래는 작가의 내면을 주관적으로 표출하는 속성을 지닌다. 그것이 느낌이든, 감각이든, 감정이든, 생각이든, 시인의 내면을 거리낌 없이 주관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시의 본질이다. 윌리엄 워즈워스의 유명한 어구, “시는 강한 감정이 저절로 흘러넘친 것이다.”(『서정 발라드』, 서문)라는 말은 서정시의 본질을 간략히 요약한 명구다. 샤를 보들레르의 저 마성적 독백, “영혼이 초자연적인 상태에 있을 때 평범한 대상 속에 생의 깊이가 드러난다.”(『인공낙원』)라는 말도 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드러낸 명구다.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시, 19세기 프랑스 상징파 시가 서정시의 핵심이다. 시를 쓰려면 두 말 하지 말고 이 강령을 따르면 된다.
그러나 한국 근대시는 어떠하였는가? 한국 근대시는 국권 상실이라는 절대 위기의 시대에 서구 문화의 자극으로 출발했다. 불행한 출항이다. 나라가 망해가는 데 초자연적인 영혼이 어디 있으며 주체 못하는 감정의 출렁임이 어디 있는가? 설사 있다 해도 그것은 국권 상실에 관련된 그것이어야 했다. 다산 정약용을 알건 모르건, 시대를 슬퍼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며, 옳은 것을 권장하고 그른 것을 비판하는 뜻이 없으면 시가 아니라는, 현실 지향의 강령이 한국 근대 시인의 머리를 관통했다. 조국이 해방된 다음에도, 동족상잔의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자유당 독재가 종식된 다음에도, 국가의 불행이 지속되었으므로 그 강령은 계속 힘을 발휘했다. 시대 현실이 지사의 목소리를 요구했다.
1944년에 태어나 1959년에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문학의 꿈을 키우고 대학의 62학번으로 국문학과에 다닌 강인한(동길) 세대에게 이 양자의 강령은 분열증을 일으킬 만하다. 고등학교 문예백일장에 가서는 「오늘」이라는 서정시를 쓰고, 『현대시학』 응모에 「귓밥파기」라는 서정시를 발표한 강인한이, 시인으로 자신을 정립하는 자리에서는 시대적 결의가 충만한 야심작 「1965」와 「대운동회의 만세 소리」를 쓴 것을 어찌 우연이라 할까? 이것은 그의 시의 미래를 예고하는 두 줄기 흐름의 확고한 선언이었다.
「1965」년은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당선되었으나 대학신문에 먼저 발표되었다는 이유로 당선이 취소된 작품이고, 「대운동회의 만세 소리」는 이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당선된 작품이다. 이 두 편은 모두 분장체로 된 장형의 작품으로, 당시의 예민한 현실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1965년은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조인된 해이며 월남 파병이 결정되어 청룡부대와 맹호부대가 월남에 상륙한 해다. 강인한은 당시 가장 민감한 현실적 쟁점인 월남파병을 소재로 취하여 월남에 파병된 친구의 이야기를 시로 썼다. 당선이 취소되었을 때 대학신문의 사전 발표 외에 주제에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의심이 들었을 만도 한데, 순정한 문학청년 강인한은, 시대를 슬퍼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라는 묵시적 가르침을 따라 그 주제를 그대로 발전시켜 더 큰 규모로 확대하여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투고하여 당선된 것이다. 그 두 작품의 일부만 보이면 다음과 같다.
일천구백육십오년의 가을이 부두를 떠날 때
잠도 안 오는 이국 산천(異國山川)이 한꺼번에 빨려들어
풍선 속을 팽창하다가 수천의 비둘기 똥에 짓눌렸던 게지.
짓눌려 터지는 소리가 우리들의 방
문풍지를 울렸던 게지. 그것은 일천구백육십오년.
사랑하는 친구가 젊디젊은 나이를 총구(銃口)에 달고
가버렸을 때,
겨울은 무심히
우리들의 텅텅 빈 가슴에 무심히
겨울은 닻을 내렸다.
「1965」 부분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끊임없이 해안선을 날며 불꽃 같은 새들은 교미를 하고
끊임없이 세기를 절단하는 톱질소리는 들려오고 있었다.
콘크리트의 균열 진 음색으로 노래하라,
화약을 먹고 피는 꽃이여
귀기 서린 진홍의 꽃이여.
그 힘찬 고구려 사내의 포옹은 끈끈히 굳어버리고
비린내를 풍기며 그는 한 마리의 갑충이 되어 자빠지고 말았다.
톱질소리는 더 크게, 더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폭풍 더미의 사이렌을 항상 불어대는
조국의 새하얗게 눈 덮인 군사분계선의 어느 초소에
유성이 가만가만 내려앉을 것이다. 잃어버린 기억의 고원에도
아름다운 겨울이 반짝일 것이다.
어디선가 병사는 조국을 어깨에 메고
비운을 겨냥할 것이다.
짐승처럼 몸부림칠 것이다.
「대운동회의 만세 소리」 부분
1965년 월남 파병이 결정되어 해병대 청룡부대가 월남으로 떠난 것은 10월 초순이고 육군 맹호부대가 떠난 것은 10월 하순이다. 사랑하는 젊은 친구가 부두를 떠난 것이 가을이고 그 후 남은 사람들의 텅 빈 가슴에 겨울이 닻을 내렸다는 「1965」 인용구의 서술은 사실에 그대로 부합하는 내용이다. 친구는 총을 들고 낯선 이국 산천으로 떠나 포화의 밀림 속에 들어간 것이다. 가끔 전해 오는 에어 메일 속에 들어 있는 그의 사진 속의 웃음이, 가슴 저린 그의 쓸쓸한 유머가 안일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일상을 파열한다. 그는 당시 일반인들이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던, 그러나 우리 역사의 가장 아픈 현장인 젊은 군인들의 월남 파병을 과감히 소재로 택하여 장형의 작품으로 구성하여 신춘문예에 투고한 것이다.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의 일이다.
「대운동회의 만세 소리」는 구성이 확대되고 다면화되었다. 낯선 남지나해의 땅굴 속 초소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와 조국의 군사분계선 초소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를 병치시켰다. 그 두 병사가 공통적으로 연상하는 것은 어린 시절 대운동회의 즐거운 고함 소리와 신나는 환호의 북소리다. 그러나 순수한 기쁨의 환호성은 추억의 그림자로 사라지고 이제 균열과 대결의 시대를 맞아 알 수 없는 적을 향해 어둠 속에 총구를 겨누고 있다. 대운동회의 함성 속에 그리던 건강한 고구려 사내의 힘찬 포옹은 사라지고 자신의 비운에 몸부림치며 울다가 비린내 나는 한 마리 갑충으로 쓰러질 운명에 놓인 것이다. 월남 파병에 한정되었던 시선이 분단 조국의 현실로 확대되고, 유년의 순수한 시대에 대한 그리움 속에 분열된 양자를 통합하는 시상의 발전 양상을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당대 현실의 문제점을 첨예하게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순정한 서정의 밀도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서정의 언어로 현실의 아픔을 감싸 안는 방법을 사용한 것인데, 이러한 측면은 「대운동회의 만세 소리」에 더 강화된 형태로 타나난다. 그것은 시대의 아픔에 비판의식을 분출하면서도 시는 내면의 표출이자 영혼의 고백이라는 기본 문법을 지키려는 고민의 결실이다.
그 후로도 한국 현대사의 전개는 참담하였다. 유신 독재의 억압이 있었고 광주의 참사가 있었다. 이러한 현대사의 참혹한 파행은 시인에게 호젓이 영혼을 고백하는 소슬한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시를 통해 발언하고 비판의 육성을 토로했다. 귀엽고 어린 딸 율리에게 줄 동화책을 사면서도 그의 뇌리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매운바람 속”에 “추운 사람들이 내뿜는 하얀 입김”이 어른거리고 “길고 긴 겨울”의 “네모난 밤”(『전라도 시인』, 「밤길」)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런 양자의 길항과 교접 속에 행복한 균형으로 서정의 진경을 표현한 다음과 같은 시가 창조된 것은 분명 뮤즈의 축복일 것이다.
산수유꽃 피기 전
해야 할 일 못다 한 것이
바람 속에 왜 이제사 생각나는지
아프다
아픔을 견디다 견디다
혼자 눈 떠보는 밤이 있다
어떤 나무의 죽은 가지에
새 속잎이 돋는 걸까
아프게 아프게
연초록의 어린 사랑이 피어나는 걸까
오래 잊었던 일
새록새록 죄다짐으로 살아나서
아픔의 잎잎이
내 안에서 돋아난다
사금파리처럼
때로는 붉은 번개로
창자를 긋는 밤이 있어
눈뜨는 홑겹의 외로움이 슬프다.
「산수유꽃 피기 전」(『황홀한 물살』) 전문
이 시는 단순한 서정이 아니다. 여기 두 번 반복된 ‘아픔’이라는 말은 개인의 아픔과 시대의 아픔을 포괄한다. 그의 시의 전개 과정으로 볼 때 그렇게 판단해야 마땅하다. 이 시에 나오는 ‘죄다짐’이라는 말이 그러한 판단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죄다짐’이란 죄를 갚는다는 뜻이다. ‘인과응보’의 ‘응보’의 개념이 죄다짐이다. 이 단어가 사용된 4연은 과거의 잊었던 일이 새록새록 살아나 죄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떠오른다는 뜻이다. 시인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잎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산수유꽃이 개화하기 직전 봄에 피어나는 속잎을 보고 있다. 아픔을 견디다 혼자 눈 떠보는 괴로운 밤에 시인은 우리들의 아픔 때문에 연초록 속잎이 터져 돋아나고 노란 꽃잎이 돋아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시인은 예민한데 그는 사람들의 모든 아픔과 죄의식을 다 감싸 안은 듯하다.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 자신이 충실히 대처하지 못한 것이 죄의식으로 남아 죄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는 것이다.
세세한 아픔의 하나하나가 사금파리처럼 자신의 안에서 돋아난다고 했다. 사금파리처럼 작게 빛나되 사금파리처럼 자신의 마음을 찔러 아픔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시인의 섬세한 자의식이 속잎 돋고 꽃 피는 봄날의 장면을 편안하게 보지 못하게 한다. “때로는 붉은 번개로/창자를 긋는 밤”이 있다고 했다. 이 표현은 선명한 상흔을 가슴에 새겨 넣는다. 붉은 번개가 창자를 긋다니. 이 아프고 처절한 이미지는 다음에 나오는 “홑겹의 외로움”과 호응한다. 요컨대 이 시는 봄날의 고독과 까닭 모를 아픔을 노래한 것인데 그 고독과 아픔의 근원에는 고난의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담겨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시가 현실성과 서정성의 균형을 취한 작품이라고 말한 것이다.
서정성과 현실성이 균형을 이루면서 서정의 진경을 드러낸 작품으로 천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이 「능소화를 피운 담쟁이」다. 자연 대상을 소재로 서정의 화폭을 그리면서 그 안에 작은 존재들의 연대감을 심어 넣은 작품이다. 표면만 읽으면 자연 정경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이해되기 쉬운데, 실상을 음미하면 진정한 사랑으로 연대를 이룬 존재의 경이를 표현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념적 주제를 표면에 내세우지 않고 서정의 윤기 속에 사랑의 연대감이 저절로 우러나도록 구성했다. 엘리엇의 표현을 빌리면 장미의 향기처럼 사상이 우러나도록 배치한 것이다.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그가 시대의 중압에서 벗어나 상상의 자유를 구가하며 내면의 환상을 이미지로 펼쳐낼 때 그것은 미학적 구도를 갖춘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다. 「마리안느 페이스풀」은 시인의 상상의 자유가 관능적 언어와 긴밀하게 결합하여 미학적으로 완성된 걸작이다. 이 작품을 읽고 나는 경이와 공감을 동시에 느꼈다. 나보다 11년 연상의 완고한 국어 교사인 시인이 영국 미녀가수 마리안느 페이스풀과 그녀가 나온 에로틱한 영화를 알고 그것을 소재로 시를 썼다는 점이 경이로웠고, 그 영화를 알고 있기에 시의 내용에 백 퍼센트 공감하였다.
간절하면 이루어지나 봐요, 마리안느
미안해요 당신을 간밤 꿈속에서 만났어요
나랑 둘이서 피나콜라다를 마시기 위해
구석진 카페에 앉았는데
안타깝게도 어둠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어요
그 어둑한 두 그림자가 졸아들어
촉촉한 슬픔의 촉을 올려 오늘 내 가슴 속 어딘가
키 작은 제라늄 꽃나무로 돋아나고 있어요
낯선 곳에 가서도 나무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꽃들의 하염없이 작은 말을
귀기울여 들어주는
착한 여인, 깊은 눈빛 아름다운 여인
나는 당신의 발가벗은 몸에 장미 꽃다발을 바쳐요
장미꽃으로 앙증맞은 당신의 가슴을
장미꽃으로 간지럼을 기다리는 당신의 배를
장미꽃으로 당신의 허벅지를 다리를
가볍게 가볍게 두드려요
나를 보는 당신은 가을하늘 새털구름
셀로판지 같은 웃음을 던져 주고
마리안느, 당신의 깊은 눈동자 속에 장미꽃
장미꽃 한 잎의 꽃잎에 작은 물방울
물방울에 갇히고 마는 오토바이 한 대
지금 내 귓속에는 작은 새처럼
당신이 날아오는 안개 낀 새벽
오토바이의 길고 긴 폭음이 눈부신 금빛으로 붕붕거려요
이제 턱 밑에서부터 지퍼를 내가 열게요
신비로운 당신의 가슴골과
비밀스레 떨고 있는 아랫배까지 열어갈게요
검정 가죽슈트를 한숨에 열어서 당신의 흰 알맹이를
꺼낼 거여요
그리하여 내 입에 머금은 피나콜라다를
당신에게 부어주고 싶어요, 마리안느
예쁜 제라늄 화분에 물을 주듯이
성당의 성수대에 성수를 흘려 넣듯이
「마리안느 페이스풀」(『입술』) 전문
1946년 런던에서 태어난 페이스풀은 17세부터 가수로 활동했고 1968년 알랭 들롱과 공연한 “The Girl on a Motorcycle”(La motocyclette)에 출연했다. 우리나라에는 「그대 품에 다시 한 번」이라는 제목으로 1969년에 개봉되었다. 신랑에게 환멸을 느낀 갓 결혼한 여주인공이 알몸에 가죽 스키니 룩을 입고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고 과거의 연인을 찾아 질주하면서 사랑의 환상에 빠져드는 내용이다.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다가 결국은 교통사고로 즉사한다. 「마리안느 페이스풀」은 이 영화를 소재로 하여 여주인공의 에로틱한 모습과 환상적 욕망의 설렘을 다양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당신의 입에 내 입술로 피나콜라다 칵테일을 부어주겠다는 선정적 이미지를 “예쁜 제라늄 화분에 물을 주듯이/성당의 성수대에 성수를 흘려 넣듯이”로 전환 표현한 마지막 구절은 작품의 미학적 구도를 완성하려는 시인의 야심적 기획이다.
이러한 경향의 연장선상에서 시대의 중압에서 풀려나 봄날의 정경을 이미지의 구도로 완성하고자 할 때 다음과 같은 예술이 창조된다.
헬리콥터가 날아온다,
한 대, 두 대.
두 줄 가득 털 난 굉음을
풀어놓는다.
시끄러운 부분만 가위로
동그랗게 오려낸다.
물 위에 띄운다.
청둥오리들이 부지런히 쫓아와
동그란 하늘의 털 난 꽁무닐
콕콕 쪼아댄다.
버들개지 눈이 찔끔
놀라서 바라보는
저쪽,
안 보이는 별들이 좌르륵 쏟아져 내리는 저쪽
물살에 은비늘이 튄다.
「봄날」(『강변북로』) 전문
이 시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작품이 아니다. 시각, 청각, 촉각이 동원되어 한 폭의 풍경을 그려낸 다음 그것을 오리고 붙여 하나의 구성물로 완성한 것이다. 여기에는 소리를 잘라내 물 위에 띄우니 청둥오리들이 그것을 쪼아대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에 찔끔 놀란 버들개지의 눈이 은비늘 튀는 물살을 바라보고 더 먼 곳에는 별들이 좌르륵 쏟아져 내리는 상상의 화폭이 펼쳐진다. 이처럼 자유로운 상상에 기반을 둔 미학적 구성에는 역사나 사회가 개입하지 못한다. 사회와 역사에서 자유롭게 풀려나 그림을 그리듯 예술품을 만들어내겠다는 의식이 다른 무엇보다 선행할 때 이러한 작품이 창조된다. 이것은 예술적 창조의 자유를 누리는 방법이다.
최근의 시집 『튤립이 보내온 것들』(2017)에도 앞에서 말한 현실성과 서정성, 두 가닥의 노선이 흐르고 있다. 그 둘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거나 순조로운 결합을 이룬 작품도 있고, 어느 한 쪽으로 기운 작품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의 암울한 단면을 비판적으로 제시한 「스벵갈리 앞에 선 여인」은 현실 쪽으로 많이 기운 예다. 여기에 비해 「왼손에 대한 데생」은 서정의 미학 쪽으로 바짝 다가섰다. 전자의 작품 내부의 미세한 촉수들은 서정의 구도에 손길을 뻗고 후자의 섬모들은 현실의 운동에 손짓을 보내기도 하지만, 그 뿌리는 앞에서 말한 어느 한 쪽에 드리워 있다. 내가 판단하기에 시인의 최근 마음의 경향은 미학적 구도를 완성하는 쪽에 더 기운 것 같다. 그는 시의 절대적 본령에 해당하는 내면의 표출 쪽에 더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시집의 서문에서 ‘영혼의 고백’, ‘언어의 보석’ 등을 언급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대가 요구하는 지성의 눈길을 완전히 마다할 수도 없다. 이러한 시인의 최근 내면의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을 들라면 나는 다음 작품을 천거하고 싶다.
굴레와 채찍을 벗어날 수 없다.
눈을 감아도 나는 안다.
저 길이 내 몸속에 들어와 요동치다가
망각처럼 몽롱해지는 것을.
장밋빛 암벽의 페트라 협곡을 지날 때
방울소리와 이천 년 전의 물소리가 반죽이 되어
때로는 영혼의 기도가 된다.
그러나 그뿐 희미한 이명으로 스러진다.
게으른 몸을 태우기 위해 내 허리는 잘록하고
베두인의 채찍을 견딜 만큼 옆구리는 아직 튼튼하다.
알 카즈네 신전을 출발하여 꼭대기의 수도원까지는
무릎이 꺾이는 층계, 층계, 돌층계들
굴욕과 소금의 길.
둘러봐도 연대해야 할 동지들이 없다.
저들을 이겨낼 수는 없다고 눈을 내리뜬다.
모르는 척 수그려 귀를 닫는다.
나바테아인들의 수도원, 절벽을 늘어뜨린 산 정상에서
이방인들이 느릿느릿 등에서 내린다.
향나무를 쓰러트릴 듯 바람은 편서풍이다.
이 고통을 끝내자. 바로 지금이다,
자갈을 차며 앞으로 내달린다.
밑바닥이 바람처럼 번개처럼 다가온다.
—당나귀! 당나귀가 떨어졌다!
구불거리는 협곡,
검푸른 심연에 흰 별들이 소용돌이친다.
몸을 벗고
바람 속에서 나는 웃는다.
「장미가 부르는 편서풍」 전문
이 시는 장엄하다. 화자는 짐과 사람을 나르는 당나귀지만 그의 육성은 처연하다. 짐을 나르는 고역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절벽에서 몸을 던진 당나귀를 소재로 취한 작품일 텐데, 나에게 이 당나귀는 예술가 자신의 환유로 다가온다. 당나귀가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의 몸을 절명시키는 장면을 형상화한 이 시는 예술을 향한 시인의 절대 추구의 정신, 순명의 정신을 암시한다. 이 시는 자신의 영혼을 예술적 언어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분명 서정의 미학을 겨냥한 것이지만 언술의 바닥에 놓인 시인의 정신은 실존적이고 현실 지향적이다. 당나귀에게 가해지는 “굴레와 채찍”은 실은 시인 자신이 받는 것이다. 세상의 허위에 맞서 진실하게 살고자 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굴레와 채찍을 실감했을 것이다. “굴욕과 소금의 길”도 마찬가지 문맥이고 “둘러봐야 연대해야 할 동지들이 없다”는 탄식도 시인의 것이다. 이러한 굴욕의 삶에서 벗어나 “검푸른 심연에 흰 별들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몸을 벗고” 바람 속에 웃고 싶은 것이 시인의 마음이다. 그것이 영혼의 풍경이다. 왜 그러한가? 이 황잡한 세상에서 자신의 순수함을 지키려면 절벽에 몸을 날려 더 큰 세계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초월하겠다는 뜻이다. 일상의 국면에서는 설명하기 힘든 자기 초월의 극점을 나타내기 위해 시인은 요르단 페트라 협곡 옛 나바테아인들의 수도원을 배경으로 삼았다. 주제를 살리기 위한 미학적 배치다. 영혼의 고백을 위해 언어의 보석을 세공한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이번 시집에서 아주 중요한 작품이고 앞으로 시인의 작업도 이러한 영혼의 정련과 세공 쪽으로 집중될 것이라는 예감을 갖게 하는 작품이다. 나보다 11년 연상의 시인인데도 어쩐지 같은 세대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그의 시가 그만큼 신선한 감각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호하면서도 청신한 창조의 정신이 더욱 싱그럽게 벋어 장미의 향기처럼 주위에 퍼지기를 기대하며 내 글을 여기서 줄인다. (*)
⸻《시와시학》 2017년 겨울호, '제21회 시와시학상 특집' 중 작품상 수상자 강인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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