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을 깨어 차를 달이다
지난겨울 이 산중에서 온 몸과 마음으로 절절히 배우고 익힌 교훈은 한 방울 물의 귀하고
소중함이었다.
눈 고장에 눈이 내리지 않은 삭막한 겨울. 오죽했으면 태백에선가는 기설제(祈雪祭)를 다
지냈겠는가.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지내듯, 눈 고장에서는 눈이 내리지 않으면 기설제를
지낸다. 몇 해 전에도 있었던 일이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가 잇따르자 온 골짜기가 두꺼운 빙하로 변했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던 물소리도 빙하에 얼어붙어 더 소리를 내지 못한 그런 상황이었다. 이 산중에
들어와 15년 가까이 지내면서도 이런 일은 이번 겨울이 처음이었다. 흐르던 물소리가 멈추니
세상 자체가 정지된 듯 싶었다. 그야말로 적막강산.
지난 연말까지만 해도 도끼로 얼음을 깨고 물을 길어다 썼는데 새해에 들어서면서는 얼음장
밑으로 흐르던 물마저 얼어붙어 여기저기 아무리 도끼로 얼음을 깨 보아야 물은 없고 개울
바닥만 드러났다.
이렇게 되면 물을 찾아 ‘제2의 비트’로 철수해야 하는데 내 잠재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버틸
때까지 버텨 보기로 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선다’는 옛 가르침이 내 뒤를 받쳐
주었기 때문이다.
그전 같으면 개울이 얼어붙더라도 그 위에 눈이 내려 쌓이면 이를 보호막으로 개울 바닥까지는
얼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번 겨울은 눈다운 눈이 내리지 않아 그 같은 보호막도 없었기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럼 물 없이 어떻게 지낼 수 있었는가. 얼음을 깨어다가 그걸 녹여서 쓸 수밖에 없었다.
얼음이란 물이 얼어서 굳어진 고체이기 때문에 열을 가하면 물로 다시 환원한다. 이런 상황이니
내 겨울 안거(安居)는 일찍이 없었던 난거(難居)가 될 수밖에 없었다.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은 겨울철에 더러는 눈 녹인 물로 차를 달여 마신다고 하는데 얼음을
녹여 차를 마신다는 말은 지금껏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이번 겨울 그런 풍류의 혜택을
누일 수 없어 얼음을 깨어다가 그것을 녹여 차를 마셨다. 차 맛이 어떻더냐고? 더 말할 것도 없이
별로였다.
그 대신 나는 올겨울에 팔운동을 많이 해서 더욱 강인한 팔의 힘을 기르게 되었다. 도기로
얼음을 깨는 이로가 장작을 패는 일을 비교한다면 얼음 깨는 일이 훨씬 힘들다. 장작은 나뭇결을
따라 도끼를 내리치면 순순히 빠개지지만 얼음은 그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나무보다 단단해서
만만치 않다. 얼음 깨는 일을 하다가 장작을 패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다.
그토록 부드러운 물이 한번 얼어붙으니 돌덩이처럼 굳어진다. 인자하고 온유하던 모성도
어떤 상황 때문에 한번 뒤틀리면 이 얼음처럼 견고해지는 것일까?
최근에 내린 눈으로 얼음 대신 눈을 떠다 쓰니 내 팔의 수고를 덜게 되었다.
생텍쥐페리는 그의 <인간의 대지>에서 이런 말을 한다.
“물, 너는 생명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다. 너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우리
가슴속 깊이 사무치게 한다. 너와 더불어 우리 안에는 우리가 단념했던 모든 권리가 다시 돌아온다.
네 은혜로 우리 안에는 말라붙었던 마음의 샘들이 다시 솟아난다.”
한 방울의 물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가를 배우고 또 배운 겨울이었다.
아름다운 마무리 中에서